진공관

선정의 변 정혜윤

가을에 항상 최상단 고정하고 듣게 되는 앨범이랄까요,

첫 트랙(Writing to Reach You)부터 어떠한 순간에 대한 향수가 몰려와서 괜히 센티한 감성을 얻게 되는 건 덤입니다.

힘들 때 이 앨범을 정말 많이 들었었는데, 처음엔 비평가들이 욕했을지라도 지금 빛을 발하는 이 앨범처럼 '언젠가는 내 인생도 볕 들 날이 있겠지?' 하는 막연한 희망을 품게 해주는 멋진 앨범입니다.

조용해지면서 선명해진 밴드

《The Man Who》는 트래비스의 두 번째 정규 앨범입니다. 데뷔작 《Good Feeling》의 보다 활기차고 직접적인 록에서 속도를 늦추고, 노래의 감정과 목소리의 질감을 앞으로 가져왔습니다. 크게 소리 내는 대신 짧은 멜로디 하나가 마음에 오래 머물게 하는 밴드의 방향이 분명해진 작품입니다.

트래비스를 이야기할 때 이후 영국 밴드들이 보여준 내밀한 감성과 연결하는 시선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런 계보를 알고 듣는 즐거움도 있지만, 이들의 노래를 나중에 더 유명해진 밴드의 예고편처럼 취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프랜 힐리의 작곡은 복잡한 장치를 앞세우기보다 익숙한 말과 멜로디를 반복하면서도 조금씩 감정의 기울기를 바꿉니다. 소박함 안에서 얼마나 많은 표정을 만들 수 있는지가 이 밴드의 중요한 평가 지점입니다.

당시의 평가와 오래 남은 이유

1999년 10월 엑스클레임의 롭 볼턴은 데뷔작보다 감정과 분위기를 충분히 발전시킨 음반이라고 호평했고, 〈Driftwood〉를 주요 곡으로 꼽았습니다. 첫 반응과 이후의 큰 성공 사이에 변화가 있었더라도 매체별 판단은 서로 달랐습니다.

이 앨범을 평가하는 데 유용한 기준은 강한 개별 곡과 전곡의 비슷한 분위기 사이의 관계입니다. 익숙한 온도의 노래가 이어지는 것을 일관성으로 들을 수도, 변화가 적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마음이 지친 날에는 같은 목소리와 비슷한 공간감이 이어지는 일이 오히려 끝까지 듣게 만드는 힘이 됩니다. 앨범에 대한 판단은 어떤 상태에서, 어떤 시간을 내어 듣는지와도 연결됩니다.

프로듀서의 이름을 알고 있지 않아도 녹음의 효과를 느낄 수 있습니다. 노래를 감싸는 여백, 기타와 보컬의 거리, 조용한 부분과 후렴이 펼쳐지는 부분의 차이를 따라가면 됩니다. 화려한 편곡을 덜어낸 자리에서 목소리의 작은 떨림이나 문장 끝의 호흡이 더 잘 들리는지도 살펴볼 만합니다.

Good Feeling과 비교하기

전작이 밴드의 에너지를 바깥으로 내보냈다면 《The Man Who》에서는 생각을 안쪽으로 돌리는 시간이 늘어납니다. 드럼과 기타가 보컬을 밀어 올리는 방식도 거칠게 몰아가기보다는 노래의 문장이 들릴 공간을 만드는 쪽으로 달라집니다. 같은 밴드가 힘을 빼는 일이 단순한 후퇴인지, 자기에게 맞는 중심을 찾는 일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두 음반을 비교할 때 빠른 곡과 느린 곡 하나씩만 고르면 변화가 너무 단순해집니다. 각 앨범의 첫 곡을 짧게 들어본 뒤, 처음부터 어떤 상태의 청자를 상정하는지 이야기해보는 편이 좋습니다. 《The Man Who》는 큰 사건을 설명하기 전에 이미 지나간 일을 떠올리는 듯한 목소리로 문을 엽니다. 그 첫인상이 이후의 곡을 받아들이는 속도에도 영향을 줍니다.

함께 비교할 음반Good Feeling (1997)

에너지

이전Good Feeling의 보다 직접적인 기타 록

이번속도를 늦추고 노래의 정서를 오래 유지

보컬의 자리

이전밴드의 추진력 위에서 앞으로 나가는 목소리

이번반주의 여백 안에서 문장과 호흡이 가까워지는 목소리

변화의 방향

이전여러 록의 영향이 보이는 데뷔작

이번밴드에게 맞는 감정과 소리의 중심이 선명해지는 두 번째 음반

Driftwood의 위로는 어디에서 올까요

〈Driftwood〉는 떠밀려온 나무라는 이미지를 제목에 놓습니다. 이 이미지를 곧바로 정답이 정해진 교훈으로 바꾸기보다, 가사의 상대와 노래를 듣는 자신 사이의 거리를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멈춰 있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 위로로 들리는지, 움직여야 한다는 독촉으로 들리는지는 그날의 마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후렴의 선율이 익숙해지는 동안 반주가 얼마나 크게 달라지는지 들어보세요. 감정의 크기는 악기가 갑자기 늘어나는 데서만 생기지 않습니다. 같은 문장을 다시 듣는 동안 그 말의 뜻을 청자가 조금 더 알아듣게 되는 데서도 생깁니다. 가을의 향수와 희망을 떠올리며, 반복할수록 말의 무게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들어볼 수 있습니다.

귀 기울일 소리

  1. 첫 곡 〈Writing to Reach You〉의 도입을 들은 뒤 〈Driftwood〉로 넘어가 앨범의 공통된 공간감을 살핍니다.
  2. 주선율을 따라 한 번 듣고, 다음 후렴에서는 뒤쪽의 화음과 반주를 따라갑니다.
  3. 보컬이 문장을 끝낸 뒤 악기가 남기는 여백에 집중합니다.
  4. 큰 소리와 강한 감정이 같은 순간에 오는지 확인해봅니다.
  5. 〈Slide Show〉 같은 후반 곡을 덧붙이면 초반의 감정이 끝까지 어떻게 유지되는지 비교할 수 있습니다.

함께 나눌 이야기

  • 이 앨범을 가을의 음악으로 느끼게 만드는 것은 악기, 목소리, 개인적인 기억 가운데 무엇인가요?
  • 같은 분위기가 오래 이어지는 음반을 언제 편안하게 느끼나요?
  • 〈Driftwood〉의 말은 다독임으로 들리나요, 움직이라는 권유로 들리나요?
  • 힘든 시기에 들은 앨범을 다시 들으면 당시의 감정도 함께 돌아오나요?
  • 밴드가 힘을 빼면서 얻은 것과 잃은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 평론과 자신의 경험이 다를 때 어느 쪽이 이 음반을 다시 듣게 하나요?
베란다프로젝트 · 김동률 & 이상순 · Day Off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