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공관

선정의 변 이동진

한창 힙합의 매력에 처음 빠지던 때인데, 앨범 한 가득 랩을 꽉꽉 담아서 청각적 호기심을 소화해 주었어요. 앨범은 2CD로 분량도 많은데 1CD에 무게 있는 힙합, 2CD는 가요 같은 힙합을 담고 있어 많이들 아는 명곡 (Fan, Love Love Love) 은 2CD에 있습니다. 앨범으로 들을 때 매력은 각 노래가 분절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인데, 이 앨범은 곡 사이 곳곳에 연주 음악을 배치해서 본 곡이 시작될 때 쾌감을 높이거나 곡 간 이음새로 잘 활용합니다. 그래서 1CD는 특히 하나의 누아르 영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2CD의 타이틀곡 fan이 시작되기 전 연주 음악은 본 노래가 시작될 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돕습니다. 지금은 한국 힙합의 레전드가 된 이들의 젊은 모습도 볼 수 있는 건 덤이고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3 끝나고 대학 입학 전 2007년 1월 겨울로 가는 느낌이네요. 감사합니다!

대중적인 그룹이 가장 넓게 펼친 지도

에픽하이의 네 번째 정규 앨범은 두 장의 CD로 나뉩니다. 《The Brain》과 《The Heart》라는 이름부터 서로 다른 입구를 제안합니다. 같은 팀의 랩과 제작이 한쪽에서는 더 어둡고 단단한 질감을, 다른 쪽에서는 다양한 장르와 선명한 팝의 멜로디를 만듭니다. 하나의 팀 안에 있는 서로 다른 음악적 욕망을 숨기지 않고 구조로 만든 음반입니다.

에픽하이의 아티스트로서의 평가도 이 양쪽을 함께 볼 때 입체적입니다. 대중적인 후렴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과 무거운 말과 긴 랩을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이 대립하지 않습니다. 노래마다 청자를 만나는 방식이 다르고, 그 차이를 두 장의 흐름으로 배치합니다. 히트곡을 아는 사람도 나머지 곡을 따라 들으면 기억했던 그룹의 크기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공식 수상 해설이 높이 평가한 것

이 음반은 2008년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힙합 음반을 수상했습니다. 선정위원 김학선은 힙합의 어법에 충실한 첫 CD와 틀을 넓힌 두 번째 CD가 각각 일관된 흐름을 갖춘 점을 평가했습니다. 많은 곡을 넣었다는 양적 야심보다, 서로 다른 음악을 두 장의 구조로 묶어낸 판단이 핵심입니다.

긴 음반을 듣는 일에는 부담도 있습니다. 좋은 노래가 많다는 장점과 한 번에 집중하기 어렵다는 한계는 함께 생길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두 장을 구분한 형식이 그 부담을 덜어주는지, 오히려 대비를 더 강하게 만드는지 들어볼 수 있습니다. 한 곡을 건너뛰었을 때 단지 좋은 노래 하나를 놓친 것인지, 앞뒤 장면의 관계까지 달라진 것인지도 중요합니다.

첫 CD를 누아르 영화처럼 느끼는 감상은 이런 흐름을 설명하는 한 가지 언어가 됩니다. 모든 노래가 하나의 실제 줄거리로 이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비슷한 질감과 말의 긴장, 다음 곡을 준비하는 짧은 음악들이 연속될 때 청자가 하나의 분위기 안에 오래 머물게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Swan Songs에서 넓어진 것

직전 정규작 《Swan Songs》가 에픽하이의 대중적인 접점을 크게 넓힌 앨범이라면, 《Remapping the Human Soul》은 그 성과를 바탕으로 더 많은 음악과 무거운 질문을 담을 공간을 만듭니다. 힙합과 팝 사이를 오가던 팀이 양쪽을 각각 길게 펼쳐놓는 변화입니다. 그 사이의 《Black Swan Songs》는 리패키지 성격의 음반이므로 새 정규작의 연속과 구분합니다.

비교할 때는 대표곡의 후렴만 들으면 팝적인 성공이 계속됐다는 인상에 머물기 쉽습니다. 랩이 한 곡에서 차지하는 시간, 참여한 목소리가 들어오는 위치, 곡이 끝나고 다음 곡이 시작될 때의 기분을 함께 살펴보면 규모가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크게 성공한 음악가가 그다음에 더 안전한 선택을 해야 하는지 묻기에도 좋은 작품입니다.

함께 비교할 음반Swan Songs (2005) · Black Swan Songs (2006)는 리패키지로 구분

직전 정규작

이전Swan Songs의 넓어진 대중적인 접점

이번두 CD로 서로 다른 음악의 가능성을 길게 펼침

제작의 구조

이전한 장 안에서 힙합과 팝을 오감

이번The Brain과 The Heart로 각 흐름의 일관성을 세움

곡 사이의 관계

이전개별 싱글로 기억하기 쉬운 입구

이번전주곡과 연결 트랙이 익숙한 노래의 시작을 새로 만듦

피해망상과 Fan의 입구

〈피해망상 Pt. 1〉에서는 이야기하는 목소리와 비트가 만드는 긴장을 따라갑니다. 가사를 빠짐없이 이해하는 일에만 집중하면 랩의 발음과 리듬이 주는 압력을 놓치기 쉽습니다. 어떤 문장은 의미로 다가오고 어떤 문장은 말의 속도 자체로 긴장을 만드는지 들어보세요.

〈Love / Crime (Fan Prelude)〉는 제목부터 다음 곡을 준비하는 음악입니다. 이를 〈Fan〉과 이어 들으면 익숙한 히트곡의 시작이 독립된 시작이 아니라 앞 장면에서 도착한 순간이 됩니다. 처음부터 〈Fan〉을 틀었을 때와 짧은 전주곡 뒤에 틀었을 때 같은 첫 소리가 얼마나 다르게 느껴지는지 비교할 수 있습니다.

앨범에는 독립된 싱글보다 짧고 덜 눈에 띄는 곡들이 있습니다. 이런 곡들이 곧바로 건너뛸 대상인지, 긴 음반이 숨을 쉬는 부분인지는 실제로 이어 들었을 때 판단할 수 있습니다. 두 장짜리 음반이 하나의 긴 작품이 되는 데는 대표곡 사이의 작은 설계가 큰 역할을 합니다.

귀 기울일 소리

  1. 〈피해망상 Pt. 1〉에서는 뜻을 따라 듣는 구간과 랩의 박자를 따라 듣는 구간을 번갈아 느껴봅니다.
  2. 〈Love / Crime〉부터 〈Fan〉까지 자동 크로스페이드 없이 원래 경계대로 이어 듣습니다.
  3. 〈Fan〉의 시작만 별도로 들었을 때와 전주곡 이후의 느낌을 비교합니다.
  4. 두 CD의 첫 곡을 짧게 비교해 처음부터 다른 청취 태도를 요구하는지 살핍니다.
  5. 노래 사이의 짧은 트랙을 하나 골라 그것이 앞 곡을 마무리하는지 뒤 곡을 여는지 생각해봅니다.

함께 나눌 이야기

  • 두 장의 CD를 나눈 기준이 소리에서 실제로 느껴졌나요?
  • 연주곡 하나가 다음 노래의 인상을 바꿀 수 있을까요?
  • 길고 풍성한 앨범과 짧고 빈틈없는 앨범 중 어떤 경험을 더 자주 원하나요?
  • 대중적으로 성공한 다음에 더 무거운 작품을 내는 선택을 어떻게 보나요?
  • 랩의 가사를 모두 이해하지 못해도 이야기의 긴장감을 느낄 수 있나요?
  • 이 음반을 한 편의 영화로 느꼈다면 어떤 장면이 떠올랐나요?
James Blake · Trying Times →